한 중국인의 메이지 유신 150주년 '축사'

   2018 신년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도쿄(東京)에서 신칸센(新幹線)을 타고 일본 남동쪽 가장자리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했다. 다른 특별한 것을 위해서가 아닌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역사적 영감(靈感)을 찾고자 온 것이다. 내가 우러러 보는 메이지 유신의 영웅·지사(志士)들에게 존경의 예를 갖춘다.
 
   문혁(文革, 문화대혁명의 줄임말) 후반부, 나는 하향(下鄉)해서 상하이(上海) 원교에 위치한 펑셴(奉賢)의 농장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지청하향(知青下鄉)의 생애를 펼치게 되었으며 또한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신과 국가의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직감이 들었는데, 문을 굳게 닫아버린 붉은 중국이 장차 다시금 국가의 문을 열 것이며 외부 세계를 향해 발전의 귀감을 찾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식공부 무용론讀書無用論의 그 시대에 나는 제한적인 지식공부의 경험을 가지고 일본은 어떻게 근대 시기에 서양의 침입 속에서도 순식간에 깨어났으며 1868년에는 메이지 유신을 토대로 사회적 전환을 완성하고 중국 동쪽의 섬나라에서 일약 세계를 휘젓는 괄목상대(刮目相對)해야 하는 동양의 강국이 되었는가? 이에 반해 중국은 암흑 속에서 반세기 가까이 허덕이면서 상응하는 출로를 도저히 찾지 못한 것인가?’에 대한 간단한 문제를 떠올렸다. 이를 위해 나는 농장에서 단순하지만 힘겨운 일이 끝나는 족족 일본어를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수능시험이 부활한 1987년에 역사 전공을 선택했다.
 
   올해는 메이지 유신 150주년이며 내가 동해(중국은 네 개의 바다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발해渤海, 황해黃海, 동해東海, 남중국해南中國海가 바로 그것이며 중국이 주장하는 동해는 우리나라, 일본, 대만, 중국 등 네 나라 사이에 위치한 바다를 일컬음)를 건너와 일본에서 공부한 지 34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기에 나는 가고시마에 도착해 역사를 추념하고자 한다. 가고시마 중앙 터미널에서 나오자마자 형형색색의 깃발이 길거리마다 걸려있는 걸 볼 수 있었고 이는 사람들에게 메이지 유신 150주년 대제(大祭)의 서막이 이미 가까워졌음을 알려줬다.
 
   가고시마는 조용한 도시로 도쿄, 오사카(大阪), 교토(京都)처럼 번화한 거리도 중국인 관광객이 꽉 찬 거리도 없다. 천천히 메이지 유신 기념관의 역사적 좁은 길을 걸어가면서 둘 혹은 셋 정도 짝지어진 역사 추적자만 있을 뿐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서양에게 침범당한 아시아에서 일본 또한 식민지 위기를 직면했을 때 에도 성(江戶城) 중심의 사쓰마 번(薩摩藩)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바로 이곳 가고시마에서 한 무리의 지사(志士)가 들고 일어나서는 상층 계급의 번주(藩主)에서 하층 계급의 무사까지 그들이 일련의 개혁구망(改革救亡)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말이다. 28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는 나고시마의 가장 아름다운 일본 전통 정원인 선암원(仙岩園) 바로 옆에서 서양식 제철, 조선, 방직을 중심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는 아시아 최초 근대 산업이며 세계유산에 열거된 집성관사업(集成館事業)이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많이 언급하는 메이지 유신 삼걸(三傑) 중 조슈 번(長州藩) 출신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외에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926-1878514)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 1828123-1877924) 둘 모두 나고시마 출신의 하급 무사였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합종연횡(合縱連橫) 아래 사쓰마-조슈 동맹이 막부에 대항했으며 대정봉환大政奉還의 왕을 위해 전력과 충성을 다한다는 직접적인 행동으로서 썩어 문드러진 에도 막부(德川幕府)를 뒤엎어버리고 서양과 맞서 대항할 수 있는 근대 일본을 재촉했다.
 
   사이고 사상 아시아에 영향을 끼치다
 
   메이지 유신이 내게 준 가장 깊은 인상은 당시에 각 번()의 군주와 영웅이 함께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모두 외적이 당면해있음을 깊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힘을 모을 필요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막부를 대표하는 가쓰 가이슈(勝海舟)와 막부를 토벌하자는 유신의 대표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는 화평을 의논하고자 담판에 나섰고 유신의 군과 병사가 에도 성(江戶城)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할 수 있게 하였으며 전례가 없는 정권 교체를 완성했다. 이 뿐만 아니라 개국에 있어 으뜸의 공을 세운 사이고 다카모리로서는 그가 강조한 정한론征韓論이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인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면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음은 물론 몇 년 후 사족(士族)을 동정해서 반란군에 가담해 메이지 신정부와 적으로 맞서고 (결국) 패배 후 할복하기에 이른다. 2년 후 천황의 특별사면이 내려져 사후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3품의 관직에 추증하였다. 메이지 유신의 부국강병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긍정적 가치가 되었으며 너 죽고 나 살자你死我活와 같은 정권투쟁을 초월하였다. 이는 아시아 근대화에 작지 않은 계몽을 가져다주었다.
 
   올해의 메이지 유신 150주년은 가고시마의 축제 중심을 사이고 다카모리에 집중시켰으며 그의 경천애인敬天愛人격언을 각 지방에 출현토록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환영받고 있는 NHK 대하드라마 역작 또한 사이고 다카모리이며 원작자는 저명 여류작가 하야시 마리코(林真理子)이다. 이 또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데, 메이지 유신의 거인 사이고 다카모리로서 그는 기세가 드높고 자유분방한 일생을 살았으며 양명학을 굳게 믿었고 청렴하고 결백했으며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갖다 바쳤고 근대 일본에 있어서는 한층 더 높은 정치 인물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마오쩌둥(毛澤東)조차도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러러 사모했는데 학문을 위해 집을 떠나는 틈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시를 개사해서 아버지에게 바친 적이 있는데, “뼈를 묻는데 어찌 뽕나무 가래나무 땅이 필요하리, 인생 도처가 모두 청산이거늘을 읊으며 원대한 포부를 표현했다. 보시다시피 사이고 다카모리의 성공은 일본에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나라의 개혁자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쉬운 점은 메이지 유신이 비록 일본 근대화의 성공을 초래했지만 강대해진 일본의 향후 방향에 관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존황양이, 정한론, 정대론등을 포함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 등 유신 관리의 정치적 유산으로 하여금 20세기 이후 큰 길에서 벗어난 작은 갈래로 걸어가도록 하였으며 쓰고 떫은 전쟁의 패배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 정치인은 단지 타인의 말을 자기 것처럼 여길 뿐
 
   나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 등 유신지사(維新志士)의 동상과 출생지 묘비 앞에서 배회하며 역사를 추념하며 또한 오늘에 대해 깊은 회포를 느낀다. 가고시마(鹿兒島)의 맑고 시원하면서도 약간의 추위가 메이지 유신이 창조한 일본의 휘황찬란함을 나타내며 일본과는 멀어져가고 있다. 오늘 일본은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기로에 놓여있는데 (지금의) 아시아의 정세와 당시(메이지 유신)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국의 굴기(崛起)가 세계의 모습과 국면을 뜯어고쳤으며 또한 일본의 미래에도 영향을 끼쳤다. 안타까운 점은 지금의 일본 정치인은 메이지 유신지사가 가졌던 당시의 눈빛과 모습, 기백(氣魄)이 없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등 정치인은 그저 일본 우익의 언어를 자신의 것처럼 여긴 채 중국과 일본이 함께 손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를 놓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도시의 산꼭대기에서 가고시마(鹿兒島) 시가지를 조망하고 굽어보니 그곳에는 바로 시마즈(島津) 가문이 가고시마의 수성(守城)-가고시마 성[鶴丸城-鶴丸鹿兒島의 별칭] 유적지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가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중 실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새로운 시대를 이뤘지만 일본 사족(士族) 최후의 혼백을 데리고 가버렸다.
 
   나는 메이지 유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존경의 예를 갖추며, ‘(그의) 그것은 일본 최후의 휘황찬란함이었으며 한 번 가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라고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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